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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기억해야 할 역사 “6·6 반민특위 습격사건” 후손에게 교훈 남겨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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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기억해야 할 역사 “6·6 반민특위 습격사건” 후손에게 교훈 남겨줘야
  • 김규용 기자
  • 승인 2020.06.01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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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자 1949년 이래 처음으로 효창공원에서 고 백범 김구선생의 11주기 추념식이 공식적으로 열렸다.(출처=국가기록사진)
이승만이 하야하며 1949년 이래 처음으로 효창공원에서 고 백범 김구선생의 11주기 추념식이 공식적으로 열렸다.(출처=정부기록사진집)

[뉴스저널리즘=김규용 기자] 6월은 우리나라를 위해 자신을 산화하며 희생하신 분들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호국보훈의 달이다. 이 기억을 통해 우리는 다시 역사적 희생이 반복되지 않기를 기원한다. 국가가 기념일까지 제정하고 기억하자는 것은 과거의 잘못을 다시 되풀이하지 말자고 하는 국민적 다짐이다. 최근에 우리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가진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너무 빠르게 돌아가는 현대사회에서 우리의 역사는 하나의 스토리처럼 무관심속에 묻혀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가 점점 고도화로 발전할수록 우리는 역사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는 말처럼 미래세대, 우리의 아들·딸들의 미래를 위해서인 것이다. 비록 우리 스스로가 과거에 잘못한 부분일지라도 정확히 기록해야 한다. 이는 다음세대가 똑같은 실수를 하지 않도록 교훈을 삼게 하기 위해서이다. 올바른 역사를 전하는 것은 다음세대에게 반복되는 잘못을 경계하며 더 좋은 사회를 건설해 나가라는 우리들의 친절한 유산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잘 못된 역사의 기록은 바로 잡아야 한다. 우리가 처벌하지 않은 범죄는 다시 발생했을 때 방조자가 되기 때문이다.

1949년 6월 6일 중앙청 205호에 위치한 특별수사팀에 경찰의 기습적인 습격이 일어났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한 나라 안에서 공권력에 의해 공권력이 습격당하는 일은 쿠데타가 아니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 사건의 배후가 쿠데타와는 전혀 상관없이 국가의 원수인 대통령에 의한 지시였다. 국가의 원수가 무력을 이용하여 자신의 하부 조직을 습격하고 와해한 것이다. 이 사건은 단순한 공권력에 의한 공권력 탄압에 그치지 않는다. 결국 친일청산의 정당성을 획득하지 못한 정권이 결국 “빨갱이”라는 단어로 반공프레임을 가져가게 되는 변곡점이기 때문이다.

노덕술과 친일파에 의한 반민특위 해체의 상관관계

1949년 1월 5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가 중앙청 205호를 거점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1949년 1월 친일악질경찰 노덕술을 체포했다. 노덕술은 반민특위 수사대상 최상위에 있던 인물로 일제강점기에 친일 경찰이었다. 그의 악행은 우리 민초들을 넘어 독립투사를 잡고 고문하는데 혈안이 되었던 인물이다. 노덕술은 일제강점기시절 경찰을 하며 1945년 8월 15일 해방 당시 노덕술은 평양경찰서장을 맡고 있었다. 이후 소련군이 진주하며 군에 의해 체포되지만 그해 12월 곧 석방된다. 이때 노덕술은 남쪽으로 남하하며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에 의해 발탁되며 수도경찰청 수도과장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이듬해인 1946년 4월 당시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를 암살한 한현우와 공모자를 체포했다. 이때 노덕술은 장택상을 비롯한 경찰 수뇌부의 인정을 받게 된다. 그리고 이후 ‘반 이승만 세력’과 ‘좌익분자’숙청과 검거활동을 주로 했다. 노덕술은 반민특위에 체포되기 1년 전인 1948년 1월에는 장택상을 암살하려 했던 박성근을 체포했다. 그리고 경찰곤봉으로 수차례 머리를 가격하고 물고문으로 결국 박성근이 사망했다. 노덕술은 사망한 박성근의 처리를 고민하다 창문을 열고 “저 놈 잡아라.”라며 소리쳤다. 박성근이 도망친 것으로 위장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시신을 얼어붙은 한강에 얼음구멍을 파 그 속으로 밀어 넣어 버렸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며 경무국 수사국에 체포되었다. 하지만 당시 같은 친일 경찰의 비호아래 도주했다. 그리고 노덕술은 도주 중에도 경찰지프와 경호원을 대동하며 경찰 수뇌부를 만나는 등 활보했다. 그러면서 1948년 10월 말경에 수사과장 최난수, 사찰과 부과장 홍택희 등과 모의하여 백민태라는 청부업자에게 반민특위 인사에 대한 테러를 지시했다. 그러나 백민태가 이를 자수하며 사실이 밝혀졌다. 백민태의 자백에 의하면 “반민특위 간부 15명을 38선으로 유인한 뒤 살해하는 것”이었다. 민족인사에 대해 ‘빨갱이’라는 프레임을 씌우기 위해서였다.

반민특위를 조직하려던 했던 민족주의자들은 친일인사에 대해 청산을 요구하고 있어 분명 위협이 되고 있었다. 친일파들의 입장에서 보면 핵심인물을 하루라도 빨리 없애야 자신들의 안전이 보장되는 것이다. 노덕술과 몇몇의 경찰에 의해 자행된 백민태를 이용한 암살시도는 배후가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또 친일파가 장악한 정권에 의해 묵인되었다. 백민태의 진술에 의하며 “이들 15명을 사살하고 월북하려 해서 죽였다.”라고 진술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증거물로 이들로부터 받은 암살대상자 15명의 명단과 권총, 수류탄 등을 증거물로 제출했다.

반민특위가 조직되며 노덕술을 체포한 것은 1949년 1월 그의 애첩 기생 김화옥을 통해서다. 당시 동화백화점 이두철 사장 집에서 권총 6자루와 많은 양의 실탄을 가지고 있던 노덕술을 검거했다. 또 노덕술은 당시 34만원이라는 막대한 현금을 가지고 있었다. 노덕술이 검거되기 2년 전인 1946년 기준 쌀값이 80kg 한 가마니에 3.86원이었다(1949년 당시 기록된 기준이 없음). 노덕술을 조사를 했던 반민특위의 기록에 따르면 그의 재산이 당시에 60~70만원에 달했다고 한다. 노덕술의 재산을 현재가치로 환산하면 수백억이 넘는 막대한 액수였다.

1945년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며 경무 뜰에 앉은 이승만이다.(사진출처=국가기록사진)
1945년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며 경무 뜰에 앉은 이승만이다. 순진한듯 웃는 저 웃음뒤로 무고한 수많은 목숨이 사라졌다.(사진출처=국가기록사진)

노덕술이 검거되자 이승만은 반민특위위원장을 직접만나 “노덕술은 반공투사”라고 말하며 석방하라고 종용했다. 그러나 반민특위를 이를 거절했다. 그러자 이승만은 국민들에게 “정부인사에 대해 조사를 중지한다.”고 공포했다. 그리고 반민특위법 개정을 통해 이들의 구출을 시도하지만 의회가 승인하지 않았다. 결국 이승만은 정치적 음모를 꾸미기에 이른다. 이승만과 추종세력은 국회의원 중 공산주의 명령으로 활동하는 의원이 있다며 국회에 공산주의 프락치가 있다고 공포한다. 그러면서 ‘국회프락치사건’이 조작된다.

이승만은 자신에게 반기를 들었던 소장파 의원들에게 “빨갱이”라는 프레임을 씌워 의원 3명을 구속해 버린다. 그러나 말도 안 되는 사실에 격분한 국회가 ‘국회프락치사건’으로 구속된 의원3명에 대해 석방을 결의했다. 그러자 친일인사들은 다시 파고다 공원에서 석방을 가결한 국회의원에게 “다 같은 빨갱이”라며 반공프레임으로 몰고 갔다. 그리고 6월 3일 “반민특위는 공산당의 앞잡이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반민특위로 쳐들어갔다. 그러자 반민특위는 이들의 배후에 이미 반민행위로 체포명단에 올라있던 서울시경 최운하 사찰과장과 친일경찰간부들이 있음을 알고 이들 중 몇을 체포했다.

경찰은 기다렸다는 듯 6월 6일 7시에 윤기병 중부서장을 필두로 장경근과 이호, 김태선 시경국장의 비호를 받으며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했다. 이때 반민특위에서 활동하던 특별경찰들을 무자비하게 폭행하며 무장을 해제시켰다. 그리고 권승렬 검찰총장이 소란소리에 특위사무실을 방문하자 친일경찰은 권승렬을 총으로 위협하며 몸수색과 함께 권총을 빼앗았다. 그리고 반민특위를 이끌던 곽상훈 검찰차장도 같은 행위를 당하며 조사하던 서류일체와 집기 등을 빼앗겼다. 같은 날 강원 춘천 경찰서도 반민특위 강원 조사부를 습격하여 무장을 해제시켰다.

또 같은 날 서울시경에서 근무하던 경찰 사찰과 소속 440명이 집단행동에 들어갔다. ‘반민특위 간부교체와 특경대 해산, 그리고 자신들의 경찰 신분보장’을 요구하며 집단으로 사표를 제출한 것. 그리고 이튿날 7일에는 6일 발표한 결의문이 시행되지 않을 경우 경찰 9천여 명이 총사퇴하겠다고 정부에 엄포를 놓았다. 이들은 친일 인사를 처벌하려는 사람들은 모두 다 “빨갱이”이라고 주장했다. 이때 이승만은 6월 9일 발 빠르게 선처를 약속하며 경찰들에게 조속한 업무복귀를 요구했다. 그러나 이는 모두 사전에 짜여 진 각본이었다는 것이 이승만 본인에 의해서 밝혀졌다.

이승만은 당시 AP통신과 인터뷰하며 “내가 반민족행위조사특별위원회를 해산시키라고 경찰에게 명령한 것이다.”라고 밝힌 바 있다. 그리고 11일 이승만은 담화문을 통해 “반민특위 활동이 민심을 소요하고 있어 부득이 특경대를 해산했다.”고 밝혔다. 결국 반민특위가 유명무실해지자 노덕술과 최운하는 이승만의 비호아래 법원으로부터 모두 무죄를 선고 받았다. 이승만의 이러한 행보가 친일인사들에게 이용을 당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신의 정치적 지지기반인 친일파를 비호하기 위한 이러한 행위는 용서받아서는 안 된다. 결국 이렇게 반민특위는 역사 속에서 흐지부지 사라지게 됐다.

필라델피아 가제라(Gazera) 교구 주교로 임명된 번은 6월 14일 오전 8시 30분에 명동성당에서 뉴욕대교구 보좌주교인 맥도널드(McDonald)의 집전으로 주교성성식(主敎成聖式)을 가졌다
김구(오른쪽 두번째)선생이 암살되기 불과 12일전인 전인 6월 14일 오전 8시 30분에 명동성당에서치러진 번 주교성성식에 참여했다.(사진출처=백범회보 62호)

민족 지도자 김구 암살 사건과 배경

반민특위습격사건 이후 백범 김구가 6월 26일 경교장에서 안두희에 의해 암살됐다. 경교장 서재에서 4발의 총탄을 맞고 사망한 갑작스러운 김구의 죽음에 국민들은 깊은 애도를 표명했다. 김구의 장례식은 10일간 진행되었으며 조문객만 120만 명이 추산되었다. 그리고 7월 5일 서울에서 치러진 장례식에는 약 40∼50만의 국민들이 찾았다. 또한 각 지방에서도 수만 명씩 모여 고인을 추도했다. 당시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던 김구는 친일 청산에 대한 국민의 정신적 지주였다. 국회프락치 사건과 반민특위 습격, 그리고 이어진 김구의 암살사건은 친일역사 청산의 길이 무산됐다.
 
김구의 암살에는 많은 의문점이 남아있다. 통일 민족의 지도자로 추앙받고 있던 김구는 이승만에게 다음정권을 넘겨주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당시 김구가 정치 복귀를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는 표면적으로는 김구와 같은 한독당 소속이었지만, 서북청년단 소속이었다. 서북청년단은 이미 잘 알려진 대로 소련군정으로부터 자치권을 인정받은 북측 민족주의자들에게 친일파 청산이 이루어지며 남하한 사람들이다. 이들이 남하하며 친일행위로 처단했던 공산주의진영 사람들에게 반감을 가진 단체가 된다.

서북청년단은 결국 친미파와 함께 친일청산의 정치적 프레임을 잃어 이승만이 비호하며 해방정국 이후 한국사에 잔혹한 일들을 도맡았다. 이들은 이승만의 지시라면 앞뒤를 가리지 않고 일을 했던 이승만의 테러 단체였다. 그리고 이들의 만행은 가장 잘 알려진 제주양민학살사건(제주4·3사건)에서 그 행위가 정말 추악하기 이를 때 없다. 또 여순사건과 거제양민사건에서도 이승만의 비호아래 추악한 짓을 일삼았다. 이후 이들의 행위는 국민방위군 아사사건과 보도연맹 사건으로 이어지며 대한민국 건국초기에 많은 국민을 이승만과 함께 학살한 장본인이다.

이러한 서북청년단 소속이었던 안두희가 김구를 암살해 무기징역이 선고됐다. 그러나 1년도 안되어서 이승만이 특별사면으로 풀어줬다. 그리고 그는 다시 육군 소위로 임관하며 한국전쟁 기간 중에 결국 형이 완전 면제되며 육군 소령으로 예편했다. 국민의 여론에 밀려 표면적으로 예편했지만 육군 정보원으로 지속적인 활동을 했다. 그리고 예편 후에 군납을 하며 부유한 삶을 살았다. 이런 안두희를 국민은 그냥 두고 보지 않았다. 이승만이 4·19로 국민이 정권을 회수하자 김구를 추종하던 곽태영에게 목이 찔리며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이후에도 수차례 테러를 당하며 결국 1996년 10월 23일 버스기사였던 박기서씨에 의해 자택에서 폭행당해 사망했다.

6월 6일은 현충일이다. 현충일은 국가를 위해 산화하신 순국선열과 전몰장병들의 영령을 기리며 추모하는 날이다. 그러나 6월 6일 반민특위 습격사건은 우리 역사를 송두리째 묻어버린 날이다. 우리의 근대사가 친일 기득권 세력에게 기만당해야 했던 서글픈 날의 변곡점인 것이다. 과거를 청산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처벌을 목적으로는 더욱 그러하다. 반백년이 훌쩍 넘어버린 역사에 대해 처벌을 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후손에게 올바른 역사, 그리고 적어도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교훈을 남겨줘야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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