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0-07-10 13:31 (금)
줄곧 장편을 써온 중견작가 박혜강의 첫 소설집 『바깥은 우중』 출간,
상태바
줄곧 장편을 써온 중견작가 박혜강의 첫 소설집 『바깥은 우중』 출간,
  • 정근우 기자
  • 승인 2020.05.29 14:3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실종과 우울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인물들
『바깥은 우중』 표지 [사진 출처 = 문학들]

데뷔 이후 줄곧 장편소설만을 출간해 온 중견작가 박혜강의 첫 소설집 『바깥은 우중』(문학들 刊)이 나왔다. “작가는 글로 말하는 것입니다. 장차 글로 계속 말하겠습니다.” 1991년 장편 『검은 노을』로 제1회 실천문학상을 받았을 때의 수상소감이다. 그 후 그는 『젊은 혁명가의 초상』, 『검은 노을』, 『다시 불러보는 그대 이름』, 『안개산 바람들 上, 下』, 『운주 1~5권』, 『도선비기 1, 2』, 『조선의 선비들 1, 2』, 『매천 황현 1, 2』, 『꽃잎처럼 1~5권』, 『제5의 숲』 등의 장편소설을 펴내면서 리얼리즘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평가받았다. 이번 소설집은 그동안 틈틈이 각종 지면에 발표했던 작품들 중 단편 6편과 중편 1편을 추려 엮은 것이다.

박혜강 작가 [사진 출처 = 문학들]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이자 시대와 불화하던 사내는 “나는 거울 없는 실내에 있다. 거울 속의 나는 역시 외출중이다”(「날개를 위하여」)라는 문장을 남기고 한 달째 행방이 묘연하다. 태평양을 횡단하며 하늘을 덮을 듯한 날개로 비상했던 그는 어느새 “패각류”처럼 입을 굳게 다물더니 “세상에 대한 사표” 쓰고서는 오랫동안 부재 중이다. 

혁명에 실패한 한 청년은 “도시에서 거대한 폭력이 휩쓸고 지나간 이후”(「미완의 탑」) 방문을 걸어 잠그고 칩거했다. 간혹 몇 번의 비밀스런 외출을 거듭하다 급기야 사라졌다. 청년의 방에는 ‘돌무더기’들만이 가득했다. 

“파스텔 톤의 청색 실크스카프”(「파랑새」)를 맨 한 여인은 낯선 사내의 트럭을 타고 동해로 가는 중이다. 시아버지의 제사가 오늘이어서 장바구니를 손에서 놓지 못하고 있지만, “파랑새처럼 하늘을 날고” 싶었던 그녀는 현재 부재 중이다. 백지 앞에서 절망하던 한 작가는 비릿한 갯내음이 스며드는 어느 낯선 방에서 아침을 맞이했다. “하루에도 팔만사천 번씩 절망하고 또 팔만사천 번씩 희망을 세우다”(「명사십리에는 순비기가 있다」) 숙취에 빠져 있다. 그는 현재 ‘블랙홀’과도 같은 글쓰기의 중력을 이기지 못해 ‘타나토스’의 유혹에 넘어가려는 중이다. 빨치산의 비밀을 간직한 품바우의 북소리는 평생 동안 울리지 않았으며(「품바우」), 혁명을 꿈꾸는 운동가는 오랜 기간 수감 중이다(「생두부」). 하다못해 동네 똥개 ‘뭉크’도 집을 나갔다(「뭉크를 찾습니다」). 예외 없이 박혜강의 소설 속 인물들은 모두 ‘실종’ 상태다. 모두들 어디로 갔을까? 

‘이상’(또는 현우)은 가고 ‘김해경’은 남았다. “현우뿐만 아니라 해경도 부재 중”이었다. 실종된 자가 남긴 과제를 남겨진 자들이 수행하고 있다(「날개를 위하여」). 아내 해경만이 아니라, 오월 광주 이후 남겨진 주체인 「미완의 탑」의 ‘형’, 남편의 부재를 견디어 내던 「파랑새」의 숙진, 어머니의 부재에서 우울의 정체를 찾아야 했던 「명사십리에는 순비기가 있다」의 ‘그’, 「생두부」의 박홍석과 이사현과 정윤철, 그리고 「품바우」의 ‘굴때장군’ 서판돌 등이 모두 이 남겨진 자들에 해당한다. 이들은 모두 사건 이후 폐허의 자리를 끝까지 지키려는 작가의 문학적 도정을 담고 있는 인물들이다. 다른 표현으로 사건 이후 문학이 제출할 수 있는 진리의 공정을 수행하는 인물들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부끄러움과 죄책감의 정동으로 오월을 서사화하고, 어디에선가는 역사의 한 장으로 오월을 기념비화하면서 과거의 사건으로 서둘러 정리하고, 누군가는 퇴화되어 버린 날개를 추억하며 눈물을 흘리고, 누군가는 현실의 늪으로 깊숙이 발을 옮길 때, 작가 박혜강의 분신들은 실종과 우울을 정면으로 마주하면서 빈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들이 주체의 실종과 우울의 긴 동굴을 통과하면서 새로운 이야기들을 써내고 사건을 지속적으로 현재화하고 있다면, 이를 ‘사건에의 충실성’이라고 말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이제 아무도 오지 않은 빈집에서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있는 어느 사내의 큰 어깨가 들썩이고 있는 듯하다. 

소설집의 제목을 박제된 천재 시인 이상의 시 「건축무한육면각체」에서 발췌한 ‘바깥은雨中’에서 따온 것은 어쩌면 더욱 거세지는 “빗속[雨中] 저편에 밝고 해맑은 풍경이 기다리”며(「날개를 위하여」 부분) 실종과 우울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소설집의 주인공들처럼, 암울 속에 갇히더라도 결코 출구 찾기를 포기하지 않고 삶을 계속하려는 노력을 바라는 마음에서가 아니었을까.

But man is not made for defeat.
그래도 사람은 패배하기 위해 창조되지 않았다.

- 어니스트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 부분,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