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저널리즘=김규용 기자] 1980년 5·18 민주항쟁을 기념하며 추모하는 5월이 되었다. 당시 희생자에게 제대로 치러주지 못한 장례를 자연도 위로하듯 들에는 라일락이 피었고 산야는 찔레꽃과 아카시아 꽃으로 하얗게 물들었다. 5·18민주항쟁은 우리나라에 민주화운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4·19의거가 제주4·3사건, 여순사건, 보도연맹사건으로 약 15만 명의 국민을 학살했던 이승만을 하야시켰다. 이후 육사 8기를 주축으로 한 군인들이 5·16 쿠데타를 일으키며 정권을 찬탈했다. 주역이었던 박정희는 독재와 공포정치, 그리고 베트남으로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을 보내며 그 목숨을 담보로 자신의 주머니를 채웠다. 그런 박정희가 자신의 부하 김재규에게 1979년 10월 26일 암살당했다. 독재정치가 막을 내리는 듯 했다.
그러나 전두환은 그해 12월 12일 당시 육사 11기를 중심으로 조직된 ‘하나회’와 함께 또 다시 쿠데타를 일으키며 최규하 정권과 국회를 해체했다. 쿠데타의 주역이었던 전두환과 노태우는 “이 나라가 안정이 되면 신군부를 물리고 좋은 정치인들에게 정권을 이양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런 약속에도 불구하고 구테타로 일으킨 신군부에 대해 반대하는 국민들의 시위가 1980년 개학을 맞은 학생들을 중심으로 전국에서 일어났다. 1980년 5월 17일 전두환의 신군부는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 시행했다. 그리고 당시 윤보선 전)대통령과 재야인사 등을 구속 기소했다. 또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공동대표였던 김대중과 지지세력 24명도 체포했다.
이들은 모두 내란음모나 국가보안법과 계엄법 위반이라는 혐의로 구속 기소되었다. 그러나 전두환 신군부는 17일 구속된 김대중은 구속 된지 5일 만에 “김대중이 국민들을 선동해서 정부전복을 획책하기 위해 5·18을 일으킨 주범이다.”며 내란음모죄로 둔갑된다. 이후 7월 4일 중간수사결과 발표를 통해 김대중과 37명에 대해 내란음모죄 등의 혐의로 육군본부 검찰부로 송치해 김대중에게 이듬해 사형을 선고했다. 전두환 신군부는 처음 군정을 물리고 정치인들에게 정권을 양도하겠다는 말을 거짓말이었다. 이렇듯 전두환 신군부는 정권을 차지하기 위한 수순에 들어갔다. 결국 약속했던 정권이양은커녕 강제하다시피 선거를 치르며 정권을 차지했다.
5월 15일 오후 서울역에는 10만 여명의 대학생들이 모이며 ‘서울역 대진군’이 열리며 학원자율화와 계엄해제를 외쳤다. 같은 날 지방대학에서도 24개의 대학이 함께 가두행진을 진행했다. 1980년 5월 18일은 일요일이었다. 이미 휴교령이 내렸고 계엄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시위를 지속하던 학생들 200여명이 광주의 전남대학교 정문에서 시위를 이어갔다. 이때 계엄군(공수부대)은 학생들에게 해산을 명령하지만 학생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시위를 진행했다. 이내 시위 학생들이 시내로 진출하기위해 이동을 시작했다. 이때 계엄군이 학생들을 향해 무차별적인 폭력을 행사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군인들의 무차별적인 폭행에 분노한 시민들이 보다 못해 시위에 합류했다.
이날 오후 4시 50분께 광주고 인근에 있던 공수부대 장갑차에서 첫 발포가 시작되었다. 공수부대원들이 시위대를 향해 총을 발포한 것이다. 이후 광분한 계엄군은 시민들을 무차별 폭행했다. 어린아이나 여자나 노인을 상관하지 않고 무차별 폭행을 하며 잔혹한 만행이 시작된 것이다. 5월 20일은 광분한 계엄군의 만행에 시민들은 무장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고 인근의 예비군 무기고와 아세아자동차에서 장갑차를 탈취해 시민들이 스스로 무장했다. 결국 공수부대는 당시 전남대학교와 광주교도소로 후퇴한다. 그리고 계엄군은 외부로 나가는 길목과 외부로의 통신망을 차단하며 광주를 고립시켰다. 또 외부로 나가는 길목으로 들어서는 모든 차량과 사람에게는 무차별 총격을 가해 아무 상관없던 민간인들이 다수 사망했다.
광주 교도소로 후퇴했던 계엄군이 시내로 진입하며 길목 저수지에서 어린아이들에게 조준사격을 하는 등 수많은 만행을 저질렀다. 이때의 사망자에 대한 증언은 이미 너무나 많이 알려져 있다. 5·18민주화운동부상자협회 경기도지부 김장덕 고문에 의하면 언론에서 “광주에 아무도 죽은 사람이 없다는 거짓 뉴스가 흘러나오자, 리어커에 죽은 여인의 시체를 싣고 그 부모가 광주역 근처로 왔다.”며 당시 이를 목격했다고 말했다. 이러한 시민을 향한 만행은 5월 27일 당시 전남도청을 사수하던 시민군들이 계엄군의 총격에 의해 사망하거나 생포되며 광주민주항쟁은 끝났다. 이후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헬기에서의 기총사격이 이때 일어난 사건이다. 아직까지 헬기에서 사격을 하도록 명령한 사람이 밝혀지지 않았지만 꼭 밝혀야 하는 중요한 일이다. 5·18 당시 광주하늘에는 무장헬기와 폭격기가 하늘을 가득 메우며 날아다녔다고 밝혀졌다.
뉴스저널리즘는 5·18민주화운동부상자협회 경기도지부 김장덕 고문을 만났다. 당시 피해자로서 개인적인 증언을 들어보기 위해서다. 김장덕 고문은 당시 25세의 나이로 5·18 민중항쟁의 피해자이자 폭력을 직접 목격하고 당했던 증인이다. 5·18민주항쟁 때 김장덕 고문은 광주에서 건어물가게를 운영했다. 그러나 학생들에게 무차별 폭행하는 계엄군의 모습에 격분해 시위에 참여했다. 늦은 시간 시위를 마치고 집으로 향하기 위해 광주역 근처를 지날 때였다. 공수부대원들이 불러 세우며 다가온 군인은 다짜고짜 곤봉으로 김 고문을 두들겨 팼다. 이때 이미 김 고문에 앞서 여러 사람이 붙잡혀 늘어선 상태로 군인들에게 맞아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한참을 정신없이 두드려 맞고 있을 때 이내 매질이 멈추었다. 그리고 매질하던 군인이 다른 군인과 대화를 하기 위해 자리를 이동했다. 이때 김 고문은 살아야겠다는 일념과 두려운 마음에 낮은 포복으로 죽을힘을 다해 그곳을 조금 벗어나 빠져 나왔다. 그 자리를 벗어났을 때 뒤에서 “다 죽여”라는 군인들의 함성소리와 함께 총이 난사되는 소리를 들려왔다고 했다고 말했다. “거기 있는 사람들이 다 죽었느냐”고 물었지만 이에 대해서는 “자리를 피해있었기에 잘은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때 “그곳을 쳐다볼 경황과 엄두가 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당시 몇 명이나 있었느냐는 질문에도 “무조건적인 폭력에 주변을 볼 경황이 없었다. 그렇지만 꽤 많은 수의 사람이 있었다.”고 기억했다.
사람들의 증언을 들어볼 때 정부가 발표한 2001년 12월 18일 기준으로 사망 218명이며 행불자가 363명 부상자가 5,088과 기타 1,520여명이라 발표되었다. 그러나 “이 상황을 보면 사망자가 더 많았을 것이란 추측이 되는데 혹시 알고 있는 부분이 있는가?”를 물었다. 이에 대해 김 고문은 “당시 소문에 죽은 사람들을 차에 실어 암매장을 했는데, 시체를 싣고 간 기사도 함께 죽여서 묻어버려 위치를 찾을 수 없도록 했다는 소문도 있었어요.”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나도 소문으로만 들어서 사실이 그런지는 정확히 알지는 못한다.”라고 말했다. 이 소문은 어디서 생겨났을까. 이를 아는 사람은 당시 가해자들만이 알 일이다. 왜냐하면 증언을 해줄 수 있는 시신을 싣고 암매장을 했던 기사까지 죽었다면 당시 가해자가 밝히지 않으면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김 고문은 그날 일에 대해 “무자비한 폭력에 공포를 느끼며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어요. 어쩌면 여기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밖에는......, 그리고 무조건 도망을 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허벅지에 대검으로 찔린 것도 모르고 낮은 포복으로 빠져나온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정신없이 현장을 빠져나오고 있을 때 아주머니 두 분과 마주쳤다. 아주머니들이 놀라며 “다리에 피가 많이 흘러요. 그러다 죽어요.”라며 허벅지를 가리켰다. 그 말에 자신의 허벅지를 그때야 봤다. 그리고 대검에 찔린 자상에서 피가 많이 흘러나오고 있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극도의 긴장과 공포로 자신이 대검에 자상을 입은 것도 인지 못했던 것이다. 이때 아주머니는 아기귀저기를 꺼내서 김 고문의 허벅지를 묶어 주었다고 했다. (당시는 순면으로 된 천을 아기귀저기로 사용했다.)
아기귀저기로 허벅지를 지혈해준 아주머니들에게 “고맙다”고 말한 뒤 이동했다. 모든 집들이 소등한 집들 사이에 불빛이 세어 나오는 한 집을 발견하고 무조건 문을 두드렸다. 집 안에서 사람이 문을 빠끔하게 열고 나와 놀라며 빨리 들어와 숨으라고 했다. 당시 집주인 아저씨도 아들이 셋인데 모두 시위에 나가서 그때까지 돌아오지 않아 걱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피를 흘리며 문을 두드리는 김 고문을 발견하고는 서둘러 집으로 들어오게 했다고 한다. 이일이 고마웠던 김 고문은 뒤에 당시 집주인이 타지로 이사했지만 어렵사리 찾아 고마움을 전했다. 아직 아쉬운 것이 있는데 “당시 나에게 아기귀저기로 허벅지를 지혈해 주었던 두 분은 찾을 길이 없어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당시 그분들 아니었으면 과다출혈로 죽었을지도 모르는데 생명의 은인들이죠. 꼭 다시 만나서 고맙다는 말을 전해야 하는데......”라며 회상했다.
김장덕 고문은 당시 구타와 대검에 의한 자상으로 몸이 불편하다. “이상하게도 5월이 되면 당시 맞았던 허리와 대검에 찔린 곳이 더 많이 아파온다.”고 말했다. 사실 당시 김 고문은 자신이 피했던 집에서 허벅지에 피가 많이 흐르자 지혈조치를 했다. 그러나 당시 의료용품이 없었다. 당시 사람들은 담뱃잎이 지혈효과가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담뱃잎을 한 움큼 입으로 씹어 상처에 덧대었다고 했다. 이후 결국 병원에서 살이 썩어가자 병원에서 수술을 했는데 상처 안에서 담뱃잎이 나오기도 했다고 말했다. 아직도 허리에 보호대를 차지 않으면 정상적이 활동이 어렵다. 또 다리도 많이 불편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공자가 되면 국가에서 많은 지원을 받는 것으로 안다. 하지만 현실을 그렇지 않다. 그러나 사실 유공자들은 일시금으로 한번 받는다. 그러나 그것도 최소 5백만 원에서 최대 3억원까지 지급한다. 혜택은 분명 존재한다. 현재 5·18유공자는 4,407명이 등록된 상태로 평균 약 5천 3백만 원이 일시금으로 지급된 상태다. 그리고 이들 유공자는 타 유공자와 동일한 수준의 혜택을 받고 있다. 정부단체 가산점 및 의료지원 등 일반적인 유공자와 동일하다. 그러나 김장덕 고문은 그러한 보상금은 그리 중요하지도 않다고 개인적인 생각을 피력했다. 내가 힘들지만 조금 노력하며 생활을 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일을 하지 않으려 해서 그렇지 일을 하겠다면 일은 얼마든지 있다. 다만 조금 꺼려지고 힘들어 보이지만 익숙해지면 그것도 나름 보람 있다고 말했다.
현재 김장덕 고문은 집수리와 같은 일을 하며 생활하고 있다. 일이 힘들지 않느냐는 질문에 “평생 동안 일을 해왔다. 물론 힘들게 일을 하고 있지만, 나름 보람을 느끼고 있다. 그리고 조금 불편한 몸이지만, 열심히 일해서 주변에서 꽤 인정도 받고 있다.”며 웃음 지었다. 김장덕 고문은 평생 불편한 몸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살아내고 있다. 지금도 주변 주민들이 일을 잘한다고 일을 많이 맡기고 있는 상황이다. 주로 어떤 일을 하시느냐고 묻자 집과 건물 수리관련해서는 뭐든 한다고 말했다. 그렇게 김 고문은 사회의 일원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에게 일침을 가했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만들어 5·18민주항쟁을 왜곡하고 폭도로 모는 사람들에게 분노까지 느껴진다고 말했다.
지난해 지만원씨가 5·18민주화운동이 북한군이 개입되었다는 망언에 대해서도 입장을 밝혔다. “아마도 당시 자신이 안전기획부(안기부) 정책보좌관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조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가해자의 입장이기에 어떻게 해서든 역사를 왜곡해야 했겠지요. 만약 그렇지 않다면 무슨 이유에서 그 같은 명확한 사실을 왜곡했는지 잘 모르겠다. 만약 본인이 왜곡한 것이 아니고 진실로 그렇게 알고 있다면 더욱 문제다. 누군가는 그렇게 말했고 그것이 그 사람을 설득할 정도로 왜곡이 되어 있다면 정말 심각한 문제다. 그것은 결국 다른 누구도 설득 당할 수 있을 만큼 체계적으로 조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을 의미한다.”며 우려를 표명했다. 그러면서 결국 “아마도 본인이 가해자의 입장이기에 어찌되었던 역사의 심판을 피해보고자하는 얄팍한 심산이었을 것”이라 추측했다. 실제로 지만원씨는 80년 당시 안전기획부(안기부) 정책보좌관으로 근무했다. 그리고 87년 육군 대령으로 예편했다.
이어 지만원씨와 같이 망발을 했던 이종명, 김진태, 김순례 의원에 대해도 “역사를 왜곡하려는 사람들이 어떻게 국회의원이 되었을까. 그들이 국회의원이라는 사실에 정말 할 말을 잃었다. 그렇게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역사를 왜곡하는 사람이 국회의원이 될 수 있었고, 국회의원으로 만든 사람들은 또 누구인가요.”라며 정치인의 역사의식에 대해 일침을 가했다. 또 “어떻게 친일파 후손들이 우리나라에서 기득권층으로 살고 오히려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더 어렵게 사는 나라가 되었을까요?”라며 의문을 제기했다. 그리고 “5·18민주항쟁도 가해자들은 한마디 반성도 없이 잘 먹고 잘 살고 있는데 왜 피해자들은 이러한 망발까지 들어가며 이 나라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요?”라며 되물어 왔다.
김장덕 고문은 “5·18민주화운동은 대한민국 역사에 있어 민주화를 이끌어간 중요한 사건이다. 당시 내가 무슨 정치를 알았겠냐만 그렇게 시민을 무차별 학살하고 국민을 향해 총을 겨누고 발포하는 것이 말이 되는가. 과거에도 이러한 일들이 있어왔고 그 과거사가 청산되지 않았기에 다시 이러한 일이 발생했던 것이다. 이번에 과거사에 대한 청산이 되지 않는다면 또 다시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래서 과거사 청산이 더욱 중요한 것이다.”라고 입장을 밝혔다. 그러면서 “반성하지 않는 사람이 역사를 왜곡한다. 부끄러운 과거가 밝혀지는 것을 꺼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는 반드시 진실을 찾아간다.”고 말했다.
우리가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아야 하는 중요한 이유는 죄에 대해 처벌하지 않으면 반복되기 때문이다. 비단 죄를 지은 당사자에게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다. 이를 보고 배운 다른 사람 또는 후손이 다시 그 행위를 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살인을 범죄라고 알고 있지만 처벌받지 않았던 사례는 다시 살인을 저지른다. 결국 반복되는 비극이 발생하는 것은 앞선 선례로 반성 없는 역사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결국 같은 비극이 발생한다면 당시대를 구성하고 있는 구성원 전체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청산도 마찬가지다, 반복되는 비극적인 역사가 반복하는 것은 당시대사람들의 잘못인 것이다. 그렇기에 역사가 왜곡된다. 그러나 역사의 왜곡은 결국 밝혀진다.
독일은 역사왜곡에 대해 중죄로 다스리는 법을 만들어 역사왜곡에 대해서는 가혹한 형을 주고 있다. 그리고 전범에 대해서 공소시효를 없애고 죽을 때까지 추적한다. 오스트리아도 나치즘으로 희생된 홀로코스트를 부인하는 행위에 대해 1년에서 20년까지 형을 처하도록 1947년 2월에 ‘나치금지법’을 제정했다. 우리도 이러한 역사왜곡에 대한 부분은 무분별한 가짜뉴스와 진실을 오도하는 행위에 대해 적절한 법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의견이 일각에서 일어나고 있다.
역사를 왜곡하는 것은 미래에 불행한 결과를 만들 수 있다. 우리는 역사를 배우며 ‘승자의 역사’를 배우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인식부터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해 본다. 결국 내가 잘못하더라도 승자가 되면 역사를 바꿀 수 있다는 사유가 이러한 무자비한 행위의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상황이라도 역사는 당시의 상황을 정확히 기록해야 한다. 정확한 역사기록을 위해서는 잘못된 과거사를 청산하여 역사를 재조명해야 한다.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정확한 역사기록과 잘못된 역사청산을 통해 근대사가 우리역사에 바로 기록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