送荷谷謫甲山 : 갑산으로 귀양가는 오라버니 하곡에게 -허난설헌-

遠謫甲山客(원적갑산객) : 멀리 갑산으로 귀양가는 나그네 우리 오빠

咸原行色忙(함원행색망) : 함경도 고원 길에 행차가 바쁘리라

臣同賈太傅(신동고태부) : 귀양가는 신하는 충신 가태부와 같다지만

主豈楚懷王(주기초회왕) : 귀양보내는 입금이야 어찌 어리석은 초회왕이랴

河水平秋岸(하수평추안) : 강물은 가을 강 언덕에 잔잔하고

關雲欲夕陽(관운욕석양) : 변방 함경도의 산 구름 석양에 물들겠지

霜楓吹雁去(상풍취안거) : 서릿발 찬 바람에 기러기 나는데

中斷不成行(중단불성행) : 중간에서 못가고 돌아 왔으면

(사진=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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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저널리즘=김규용 기자] 우리나라의 조선시대는 유교사상으로 인해 특히 여성들에게 억압과 탄압이 많았다. 비단 여성들만이 핍박을 받는 입장은 아니었다. 철저한 계급사회로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불평등 사회구조였으며 그러 불평등이 당연시 되던 시기였다. 과거 조선시대를 현대인들이 살고 있다면 가히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났을 것이다. 특히 지금의 여성의 지위를 생각한다면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조선시대를 통틀어 여성의 이름을 기억하는 인물은 손가락을 꼽을 정도로 많지 않다.

이번 ‘작가를 찾아서’에서는 허난설헌(1563~1589)을 재조명해보고자 한다. 성리학을 중심으로 가부장제도로 이루어졌던 당시 시대상황을 보면 허난설헌의 시와 그의 예술성이 알려진 것은 분명 대단한 성취가 있었다. 그러나 그런 문인이 당시의 상황을 대변하듯 27세의 나이에 요절한 것은 많은 아픔을 품고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허난설헌의 본관은 양천 허씨로 이름은 초희, 자는 경번이다. ( 실제의 이름(實名, 本名)이 아닌 부명(副名)으로 주로 남자가 성인이 되었을 때에 붙이는 이름. 예로부터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 글자를 아는 사람이면 성명 외에 자와 호(號)를 가졌고, 또 높은 벼슬을 한 사람은 생전에 임금이 내린 봉호(封號)나 사후에 내린 시호(諡號)도 가지게 되었다. 임금의 시호는 묘호(廟號)라 일컬었고, 무덤에는 능호(陵號)가 따랐다. -국어국문학자료사전)

허난설헌의 시는 당시에는 시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나 허균이 당시 명나라의 사신이 왔을 때 자신이 좋아하던 누나의 시를 보여주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명나라에서 종이 값이 오를 정도로 많이 편찬되며 읽혔다 한다.

(사진=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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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난설헌의 집안 배경

허난설헌은 현재 초당두부로 유명한 강릉 초당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초당 허엽은 1517(중종 12)∼1580(선조 13)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경상감사까지 역임한 집안이다. 허엽은 당시 당이 동서로 분당될 때 동인의 영수가 될 정도로 명망 있는 집안 이었던 것. 그리고 허엽은 두 부인을 두었는데 난설헌은 두 번째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첫째 부인 한 씨에게서 두 딸과 아들 허성을 두었고, 둘째부인 김 씨에게서 허봉, 허난설헌, 허균 등 2남 1녀를 두었다. 그래서 허난설헌은 둘째부인 김 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큰아들 허성(1548-1612)은 이후 이조판서와 병조판서를 지냈다. 또한 허봉(1551-1588)은 허난설헌을 특히 아꼈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김효원 등과 동인의 선봉이 되어 서인들과 대립했다. 1583년(선조 16)창원부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병조판서 이이를 직무상 과실로 탄핵하려다 종성으로 유배되었다. 그리고 다음해 유배에서 벗어났으나 정치에 뜻을 져버리고 방랑생활을 하다 1588년 38세의 나이로 금강산 근처에서 객사하였다. 그리고 동생인 허균(1569-1618)은 이미 널리 알려진 '홍길동전'의 저자로 봉건사회제도 개혁을 주장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결국 후익 혁명을 준비하다 결국에 역적으로 몰려 50세의 나이에 처형당하는 결과를 맞았다. 이토록 허난설헌의 집안은 당시 대단한 문장가로 알려져 있었다. 이 집안을 아울러 당시 허씨 5문장이라 불리 울 정도였으니 문장으로는 대단한 집안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율곡집'에는 아버지 허엽의 이론에 대해 모순이 많으며 문장과 글에 있어 뜻이 잘 전달되지 못한다고 혹평을 했다. 그리고 퇴계 이황은 "차라리 학식이 없어야 했다"며 개탄했다.

(사진=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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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난설헌의 스승

허난설헌과 동생 허균의 스승으로 알려진 이달(1539-1612)은 시인이자 서예가로 널리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이달은 서자 출신이며 아버지가 이수함으로 당시 영종첨사를 지냈다. 그러나 ‘이달’은 이수함과 홍주 관기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자는 ‘익지’이며 호는‘손곡’이다. ‘이달’은 허난설헌과 허균에게 시를 가르쳤다. ‘이달’도 시대적으로 당시 유행하던 송시(송대의 시)를 배우다가 정사룡으로부터 두보의 시를 배웠다 전해지고 있다. 이후 당시(당대의 시)에 심취하며 이전과는 전혀 다른 시풍을 보였다.

그리고 ‘이달’은 자신과 시풍이 비슷한 백광훈, 최경창과 더불어 이들을 당대 제일의 문사로 ‘삼당시인’라 불렸다. 지금의 봉은사를 중심으로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시를 지었다고 전해지는데 이들은 특히 전라도 지방에서 자주 모였다고 전해진다. 이런 ‘이달’이 허난설헌과 허균의 스승이었던 것이다. 후에 허균이 '홍길동전'을 지은 것은 스승 ‘이달’이 서자 출신으로 당대 제일의 문사이지만 출세길에 오르지 못함을 보고 지었다는 후문이 있다.

(사진=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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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난설헌의 불우한 생애

허난설헌은 이미 8세의 나이로 광한전 백옥루의 상량식에서 상량문을 지어 한시에 있어 신동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당시 가부장 중심으로 돌아가던 나라는 여성에게는 냉혹한 시기였다. 신동으로 이름을 날리는 재능을 보였다 하나 여성에게는 학문과 예술에 대해 배울 기회가 없었던 시대인 것이다. 다행인 것은 아버지 허엽은 매우 개방적이며 검소한 성품을 지녔다. 진보적인 학풍을 지니고 있었던 집안의 영향으로 허난설헌도 당대 최고의 스승인 ‘이달’에게서 시를 사사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허난설헌과 허균은 손곡 ‘이달’로부터 사사받으며 당대의 대문학가로 성장해 갔다. 허난설헌은 당시 스승의 낭만과 낙천적인 시풍에 따라 매우 발랄하고 자유로운 성품을 가지며 성장해 나갔다. 그러나 당시 조선은 일찍 조혼하는 풍토에 따라 15세의 나이에 결혼하며 인생의 비운이 시작된다. 허난설헌은 김성립(1562년-1593년)과 결혼생활이 순탄치 않았다. 김성립은 안동이 본관이며 자는 '여견' 호는 '서당'이었다. 아버지는 교리 김첨이었으며 어머니는 판서 송기수의 딸로 허난설헌과 특히 사이가 안 좋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조선은 2세 생산에 대한 막중한 책임이 며느리에게 있었다.

문장가로 이름을 날리기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김성립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 둘을  어린 나이에 잃는 슬픔을 겪었던 것. 당시의 상황으로는 대를 잇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여인의 책무로 시어머니와의 골이 깊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을 터이다. 이뿐만 아니라 친정은 당쟁으로 얼룩진 조선역사가 말해주듯 이로 인해 몰락해가고 있었다. 특히 자신을 아껴주었던 오빠 허봉이 금강산에서 객사를 한 것은 허난설헌이 죽기 1년전 26세 때의 일이다. 이로 인한 충격은 허난설헌에게 그 동안 쌓여왔던 삶의 무게를 뚫고 나아갈 수 없는 상황을 만들었을 것이다. 앞에 설명했듯이 허봉은 유배지에서 풀려나 정치를 뒤로 하고 금강산으로 잠적하여 객사했다.

규원( 閨怨) : 여자의 원망 -허난설헌-

月樓秋盡玉屛空(월루추진옥병공): 달 밝은 누각에 가을이 다 가는데 나 홀로 빈 방에 있고

霜打廬洲下暮鴻(상타여주하모홍): 서리 내린 갈대섬에는 저녁 기러기가 찾아듭니다

瑤琴一彈人不見(요금일탄인부견) : 예쁜 거문고 타보아도 임은 보이지 않고

남편 김성립은 허난설헌이 이러한 어려운 환경에 놓였지만, 자신의 아내로 감싸주지 못한 부분이 있다. 현대사회에 입장으로 보면 용납 되지 못 했을 것이다. 김성립은 또한 자신의 아내가 문장에 뛰어난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사실 역사서에 보면 김성립 또한 임진왜란으로 죽기 전까지 당대에 시로 명성이 높았다. 특히 어머니 송 씨와의 갈등이 허난설헌에게는 많은 고통을 주었으리라 지례짐작 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이러한 결혼환경도 허난설헌의 문학적 재능을 펼치는 것을 꺽지는 못했다. 아니 어찌보면, 이러한 참혹한 규방생활의 아품을 해갈하기 위해서도 더욱 열심히 시문을 적었을 것이다. 이러한 환경은 그가 문학의 업적을 남기는데 일조를 했을 것. 하지만, 고통을 당하는 당사자는 삶의 무게가 이루 말할 수 없이 짓누르고 있었을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조선최고의 여성문학가의 탄생은 아마도 이러한 환경적 요소도 있었을 것이라 조심스럽게 추측된다. 이러한 고통의 배경을 양분삼아 허난설헌은 당대의 대표적 규방가사인 ‘규원가’를 이때 지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니 말이다. 특히 ‘규원가’가 당 시대의 봉건주의적 사고로 규방에서만 삶을 보내는 부녀자의 한을 담고 있는 점을 보면 자명할 듯하다. 조선시대를 살아가는 여인의 한과 펼치지 못한 날개를 아쉬워하며 삶을 살아가야하는 것 등을 한스러워 하는 내용이 슬픔의 감정으로 애절히 녹아 있다.

허난설헌은 다작을 하는 것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그러나 허난설헌이 죽음을 결심하고 몸을 정갈히 매무새를 매만진 후 집안의 하인들에게 자신이 지은 시를 불태우게 하고 “이 땅에 다시는 자신처럼 불행한 여인이 태어나지 않도록 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리고 조선이란 나라에 여인으로 태어난 한 많은 인생을 27세의 꽃다운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때가 1589년으로 허난설헌은 자신이 항상 시문과 독서를 하던 자신의 '초당'에서 자결했다. 천재는 요절한다고 했던가. 당대의 천재적 시인을 이렇게 허망하게 잃어버렸다.  

우리의 이러한 뼈아픈 역사의 되풀이가 다시는 없어야 할 것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과거의 천재 시인을 되돌아보며 오늘날의 문인들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판단이다. 허난설헌에 대한 평가는 지금이라도 재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당시 허난설헌은 신사임당과 59년의 차이를 두고 태어났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신사임당과 허난설헌을 대등할 정도로 천재성을 가졌다고 평가되어졌다. 지난 역사를 통해 문학의 중요성을 재고되어지고, 문학이야말로 후세에 길이 남겨줄 훌륭한 우리 문화임을 인식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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