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미당의 전경(graphic by kgy)
명미당의 전경(graphic by kgy)

최근 우리 사회는 정치적이나 이념적으로도 많은 변화를 겪고 있다. 이러한 시기에 우리의 뇌리를 스치며 나라사랑에 대한 마음을 일깨우는 우리의 선조가 있다. 벼슬을 마다하고 청백리로 살다간 이건창(1852-1898)선생이 바로 주인공이다. 선생은 색이 뚜렷했다. 불의를 참지 못하는 성격과 청렴결백한 선생의 삶은 최근 나라의 상황을 보며 다시 조명해 본다.

선생은 강화 출신으로 본관은 전주이며 호는 ‘영재’로 이조판서를 지낸 이시원의 손자이며 부친은 이조참판을 지냈다. 청백리로 벼슬을 했지만, 그의 벼슬 생활을 순탄치 않았다. 당시 신동으로 알려지며 5세 때에 문장을 활용한다. 그리고 조선 최초로 최연소인 14세에 별시문과에 급제하였으나, 나이가 어린 탓에 등용하지 못한다. 그리고 성장한 19세에 홍문관직을 시작하여 벼슬길에 오른다.
 
이조판서인 조부 이시원(1790-1866)에게 학문을 배우며 나라에 대한 애국심을 길렀다. 굳은 성격으로 남에게 아첨을 하지 못하니 생활은 가난하고 궁핍하였다. 홍문관직을 시작으로 22세의 나이에 기록을 담당하는 서장관으로 청나라를 기행 한다. 이때 청나라의 서보와 황각 등 당대 청나라 학자들과 교류를 할 정도로 그의 학문의 깊이는 대단했다.

이후 23세의 나이로 충청우도의 암행어사로 임명되어 충청감사 조병식의 비리를 발견하고 상소한다. 하지만 이를 눈치 챈 조병식이 상소를 가로채고 자신의 치적만을 왕에게 보고된다. 이에 선생은 왕에게 이를 재상소하지만 이를 잘 살피지 못한 왕이 평안도 벽동으로 귀양을 보내게 된다. 1년여 이상을 귀양살이하다가 1880년 경기도 암행어사로 임명되며 관리들의 비리는 물론 농민들과 교류하며 도움을 주는 등 항상 불쌍한 백성을 대변했다.

이는 이건창 선생의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진 선생의 작품이다. 추석을 맞아 벼슬아치들의 집에는 풍족한 명절을 맞이하고 있지만, 이웃집 백성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벼슬아치를 꾸짖는 선생의 애민이 담겨있다.  시는 1877년(고종14) 충청우도 안렴사로 나가서 살핀 백성의 실상을 그린 오언고시로 옥운이다. 흉년에 남편을 잃은 딱한 과부의 처지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전가추석田家秋夕-이건창

 

南里釃白酒 남쪽 마을 백주를 거르고

北里宰黃犢 북쪽 마을 송아지 잡는데

獨有西隣家 유독 서쪽 이웃집만

哀哀終夜哭 너무도 슬피 밤새도록 곡하네

借問哭者誰 곡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니

寡婦抱遺腹 유복자 밴 과부라 하네

夫君在世日 저 남편이 살아있을 때

兩口守一屋 둘이서 한 집에 사는데

門前一席地 문 앞에 작은 땅이 있어

歲收僅糜粥 수확하면 겨우 죽이나 끓여먹덥디다

-하략-

1891년에는 한성부 소윤을 거쳐 승지가 된다. 그러나 비리를 고발하는 상소를 문제 삼아 다시 전라도 보성으로 유배를 당한다. 이에 선생은 더 이상 벼슬을 단념한다. 결국 왕은 1896년에 해주관찰사로 임명한다. 그러나 선생은 벼슬을 사양하고 군산의 고군산군도에 귀양살이를 하고 난 후 자신의 고향인 강화도로 귀향한다. 이후 선생은 한양에는 아예 발길을 끊은 채로 살다가 1898년 나이 47세에 생을 마감한다. 

이건창선생 생가를 알리는 표지판(graphic by kgy)
이건창선생 생가를 알리는 표지판(graphic by kgy)

이건창 선생은 당대의 시인들과도 친분이 깊었다. 시인들은 애국심을 가지고 있어 역시 평탄치 못한 삶을 살아간 경우가 대부분이다. 특히 매천 황현(1855-1910), 김택영(1850-1927), 강위(1820-1884) 등과 함께 조선후기의 4대 시인으로 불릴 만큼 시에 대한 조예가 깊었다.

매천집을 김택영이 전해주고 있는 절명시‘絶命詩’에서 보여주고 있는 매천 황현은 경술구치일인 1910년 8월 29일 집필한 것으로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절절히 담았다.

절명시 칠언절구 4수로 이루며 제1수는 황현은 이미 결심을 하고 있는 듯 보이는 싯구를 남겼다. 제2수에서 망국에 대한 슬픔을 표현하며 제3수에 지식인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한 한계를 제4수는 결국 충을 이루지 못하고 죽음을 암시하고 있다.

절명시  -황 현-

 

난리통에 어느새 머리만 허예졌누

그 몇번 목숨을 버리렸건만 그러질 못했던 터

하지만 오늘은 정녕 어쩔 수가 없으니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만이 아득한 하늘을 비추는 구나

-중략-

새짐승 슬피 울고 산과 바다도 찡기는 듯

무궁화 삼천리가 다 영락하다니

가을밤 등불 아래 곰곰 생각하니

이승에서 식자인 구실하기 정히 어렵네

-하략-

조선의 선비정신으로 결국 황현은 경술국치를 당하자 황현은 나라가 망하자 국민으로서 누구나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더욱이 사대부라는 직분으로 나라를 망친 자들이 스스로 부끄럽거나 자책을 할 줄 모르는 것에 대해 통탄한 것으로 전해진다.

또 친우 창강 김택영은 1905년에 을사늑약이 체결된 것을 한탄하여 1908년에 중국으로 망명하며 시름하며 한시와 구국의 일념으로 여생을 보냈다. 또한, 선생의 스승인 ‘강위’의 운명도 그리 순탄치는 않았다. 나라의 문란한 정치에 공분을 느끼며 살아온 시인이었다. 그러나 그의 운명은 1879년 강화도조약 때 일제와 필담을 맡는 운명을 겪었다.

이건창 선생의 문학비다(graphic by kgy)
이건창 선생의 문학비다(graphic by kgy)

이는 이건창 선생이 강화학파의 한 사람으로 경술국치를 겪었다면 스승인 ‘강위’에게 무엇이라 말했을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강화학파는 정제두 선생의 양명학을 지행합일을 실천하는 학문이었던 것. 이를 몸소 실천하는 삶을 살았던 이건창 선생이기에 더욱 그렇다.

선생이 살아오면서 지은 시가 약 400여수가 넘으며 시는 애국과 애민하는 마음이 담아져 있다. 정치적으로 타락해 버린 조선말기에 탐관오리들이 득세를 하고 민초의 고통과 조선의 운명이 그를 고통스럽게 했다. 그리고 자신의 조부인 이시원이 병인양요(1866)의 수치로 자결하는 장면과 남긴 편지는 선생의 일생을 좌우하게 되었다.

당시 14세의 이건창에게 이러한 조부의 행보는 선생의 삶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 것은 당연했다. 이조판서였던 조부 이시원은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침략하며 피난을 가야했다. 그러나 주변의 만류에도 집에 머무르며 조상의 묘를 참배했다. 이후 3통의 유서를 남기는데 그 한 통이 손자 이건창 선생에게 쓴 ‘절명미진’이었고, 가족들에게 한통과 마지막 한통을 막내아우에게 썼다.

‘절명미진’은 송나라의 정자의 문장을 인용한 글이다. 마음의 바탕이 밝아야 아름다움과 진리를 이룰 수 있다는 뜻으로 시대의 소임을 다하라는 가르침이었다. 이건창 선생의 생가는 초라하게 자리 잡고 있다. 명미당이란 현판은 조부 이시원이 남긴 ‘절명미진’을 통해 이름이 인용된 것이다. ‘명미당’에서 1910년 홍범식 선생이 경술구치를 참지 못하고 아들인 홍명희에게 “죽을 지언정 친일은 하지 말거라”라는 유서를 남기며 스스로 목을 매어 자결한다.

생가의 모습이다.(graphic by kgy)
생가옆 안마당의 전경이다.(graphic by kgy)

아래의 시는 선생이 1877년 충청우도 안렴사로 부임하며 부여를 지날 때 지은 칠언고시로 백제의 멸망을 노래한다. 그러나 감춰진 속뜻은 망국 위기의 당대의 시대상황에 대해 경각심을 주기위한 작품이다.

우리 용을 죽였네 (伐吾龍) - 이건창-

 

내 용을 죽여 나라가 망했네, 내 나라 내 용은 죽일 수 없는데

용이여 신령하고 굳센 용이여, 큰 강에 대풍(大風) 일어나

물결 세차서 건널 수 없는데 소정방(蘇定方)은 북쪽에서 오고

김유신(金庾信)은 남쪽에서 와서 건너지 못하고 배회하네.

임금은 자온대(自溫臺)에서 잔치하고 삼천 궁녀는 꽃처럼 예쁜데

만세배(萬歲杯) 만한 즐거움은 없어, 내 용을 죽여 나라가 망했네.

-하 략-

이건창 선생을 표현한 김택영은 고려와 조선을 합친 9명의 문장가에 선생을 포함시키며 역대 문장가로 극찬했다. 이런 이건창 선생의 나라사랑과 민족사랑에 현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많은 점을 시사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지만, 이미 우리는 세계 10대 국가에 들어가는 강대국으로 성장하고 있다. 이때 조선말기의 당략으로 인한 정쟁으로 나라를 망친 일을 기억하고 현 시대적 상황에 깨어있는 지식층의 반성이 필요한 때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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